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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색을 모아 브라이튼 비치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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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다다.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었고, 가면 나 또한 멋들어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바다.
어느 사진가의 사진을 통해서 소개되어서 유명해졌다는 설이 있기도 한 이곳은
바다에 놓여진 알록달록한 비치박스(Bathing Box가 정식명칭)가 유명한 브라이튼 비치(Brighton Beach)다. 

호텔일을 마치고 계획없이 찾아간 곳인데 도심에서 약간만 찾아와도 이런 바다가 있다는 것 자체는 참 좋은 일이다.
초가을의 햇살이 눈 부시던 오후의 브라이튼은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덕에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면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마음이 반비례 그래프를 그리면서 짧아지곤 한다.)




초반부터 아쉬운 소리를 하자면 멜버른의 바다는 퀸즈랜드주에서 봐 오던 것과는 달라 처음엔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퀸즈랜드주가 늘 생각하는 파란 빛깔의 바다라면 멜버른에서 만나는 바다(세인트킬다, 브라이튼 비치,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알토나 비치까지)는 뭐랄까 그 파란색에 노란 모래를 섞은 느낌이랄까.
큰 도시인 멜버른 주변에 있는 바다이다 보니 퀸즈랜드주의 바다(골드코스트, 누사, 바이런베이 등)에 비하면
미안하게도 이런저런 면에서 아쉽군이란 말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
물론 멜버른 외곽으로 가면 좀 달라진다. 




브라이튼 비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흔히 바다에서 보는 서퍼들과 조금 다른 류의 레저를 즐기는 이들이다.
분명히 서핑보드 위에 올라서 있긴 한데 패러글라이더 같은 무언가에 달려있고 자세는 요트를 타는 듯한 이 모습에
페어세일링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 혼자서 얼마나 많은 단어를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행글라이더도 아니고, 패러글라이딩도 아니고, 스카이다이빙은 더더구나 아니고. 뭐였더라 그게.




그러나 알고보면 내가 본 것은 페러세일링도 아닌 카이트서핑(Kitesurfing)이다.
파도가 없을 때도 서핑이 하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진 이 스포츠는 패러글라이딩과 서핑의 조합으로
대형 카이트(연)을 공중에 띄워 그 바람을 조종하며 올라 탄 보드로 바다 위를 활주하고 몇 미터씩 날아가기도 하는
서핑도 즐기고 패러글라이딩도 가능한 짜장면과 짬뽕, 둘다 놓칠 수 없는 짬짜면과 같은 스포츠다.
파도가 없어도 바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보니 멜버른 바다에서는 이 담대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브라이튼 비치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카이트 서핑이 아닌 비치박스(Bathing Box, Bathing Hut)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70여개의 이 비치박스가 곡선으로 휘어지는 지형을 따라 모래사장 위에 가지런히 나열된 모습은
멜버른을 나타내는 이미지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데 보통은 실물이 더 예쁘기 마련이지만,
이 비치박스만큼은 사진을 찍어야, 하나씩 보단 한꺼번에 프레임에 담아내야 그 매력이 두 배가 된다.




이 비치박스에 사람이 살고 있을까?
알록달록한 박스 하나 하나를 보다보면 이곳에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인지 어떤 용도로 쓰여졌는지 궁금해진다.
보다시피 사람이 살기에 그 크기는 크질 않아 당연히 주거용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피크닉이나
바다에서 놀기 위한 여러가지 물건을 보관하는 곳으로 보면 될 듯하다. 




평일 오후다 보니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구경하며 돌아보니
비치박스 앞에 테이블을 펼쳐놓고 와인을 마시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물건들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색깔을 바꾸려는 듯 페인트를 챙기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개인의 취향대로 만들어졌을거란 예상과 달리 이 오두막들은 정해진 기준에 맞추어 만들어졌다.
이런 것까지 규칙에 따라야 하는가 반발심이 생길만도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심하게 튀는 비치박스가 없이
전체적으로 잘 어울러져 이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멜버른답게 호시어레인(드라마 '사랑한다 미안하다'에 나온 그래피티가 많은 거리)처럼 그래피티로 가득한 비치박스였다면
소지섭, 임수정처럼 비치박스 앞에서 폼을 잡을 수도 있었을텐데. (미안하다, 폼안난다)




나무로 지어진 이 작은 오두막은 하나 하나가 각자 주인이 다르며 가격 또한 많이 비싸다는 이야기.
(소문에는 하나 당 20만불, 우리 돈으로 2억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싸지 않은가.)
그렇게 비싼데다가 크기에서 페인트 색상까지 가이드에 따라서 꾸며야 하니 이것이야 말로 전세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집을 예쁘게 꾸며놨더니 주인이 세를 올린대요라는 뭐 그런 말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알록달록한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이쁘다보니 웨딩촬영 장소로도 브라이튼 비치는 인기가 넘친다.
이 날도 신부와 들러리의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것도 미리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
게릴라전투를 하듯 빨리 찍고 사라진다면 잡을 수 있겠냐만은 규정대로라면 웨딩촬영이나 광고용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미리 
베이사이드 시의회(Bayside City Council)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

앞서 말했듯 치고 빠지며 드레스를 입고 도망(?) 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냥 찍는 것도...




혹시 어렸을 때 색 많은 크레파스를 가져본 적이 있는지? 64색 둘리 크레파스 같은거.
브라이튼 비치를 보며 생각한 것은 다 닳고 나면 또 사주지 않을까봐 아껴 쓴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그때의 기억이다.
선물받았다는 기쁨보다 딸깍 소리 내면서 크레파스 통을 열었을 때의 그 다양한 색의 알록달록함, 
이 바다는 딱 그 크레파스를 닮았다. 어떤 색을 골라서 칠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기억.




바다 자체가 주는 감동은 확실히 덜하지만,(그렇다고 별로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곳이 좋은 이유는 역시 크레파스와 같은 골라보는 재미가 있어설까.
오늘은 예쁜 조개도 몇 개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가고 비치박스 앞에서 이런저런 웃긴 자세로 사진도 찍어본다.
물 속에 들어가서 뛰어노는 것과 다른 재미를 찾았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란 생각이 들어 만족하며 돌아선다.

오늘은 챙겨 간 조개에다가 크레파스로 브라이튼을 그려넣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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